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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속 거대한 공간의 세계
MOF로 여는
무한 설계의 시대


화학과 최원영 교수팀

보이지 않는 분자의 공간을 설계하는 화학, 금속-유기 골격체(MOF)가 최근 노벨화학상 수상을 계기로 조명을 받고 있다. 분자가 머물고 오가는 ‘빈 공간’을 의도대로 디자인할 수 있다는 이 개념은, 화학이 물질을 만드는 학문을 넘어 이제 ‘공간을 설계하는 단계’로 들어섰음을 시사한다. MOF를 처음 만난 지난 2004년 이래 꼬박 20년을 MOF와 마주해 온 최원영 교수는 자신의 요즘을, 수많은 이름이 흐르는 엔딩 크레딧 너머의 영화감독으로 비유했다.

  • Words. 편집실   Photographs. 홍승진
MOF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성과 이면에는 배척과 저항을
견디며 담담하게 디뎌 온
연구자의 확고한 시간이 있다
2004년 본격 합류, 성장 서사의 산증인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재물대 위 시약병 속에는 낮게 깔리거나 미세하게 부유하는 검은 입자들이 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이 미세한 구조체가 최원영 교수의 연구 주제이자, 그가 매일 마주하는 삶의 현장, 바로 MOF의 세계다. MOF 인연을 묻자, 최 교수는 기다림 끝에 만난 이 구조체가 ‘또 하나의 세계’로 다가왔던 미국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들려줬다.
“조교수가 되어 무기물을 기반으로 한 자기조립(self-assembly)을 구상하던 중이었어요. 실험실 리노베이션이 예상보다 길어지더군요. 자칫 연구 경력 전체가 흔들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반 화학 실험실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찾던 중에 MOF를 만났습니다. 테뉴어(tenure)를 받고 다양한 커리어를 띄우려면 어느 하나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MOF가 저를 살린 셈이라 할 수 있죠.”

새로운 개념이 학문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늘 긴 시간이 필요하다. 연구가 깊어진다고 해서 곧바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개념과 질서를 흔드는 도전일수록 배척과 저항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다만 그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은 연구자들이 모여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다면, 비로소 그 필드는 성장의 단계로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지금은 ‘노벨상 수상’이라는 성과로 주목받고 있지만, MOF 역시 한때는 불모지에 가까운 영역이었다는 것이 최 교수의 설명이다. 배척과 저항의 시간을 충분히 소화하고 축적했기에, 그 끝에 노벨상이라는 영광이 따라올 수 있었다는 것. 달리 말하면 ‘노벨상 수상’이라는 성과 이면에는 위축된 시간을 견디며 담담하게 발 디뎌 온 연구자의 확고한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MOF는 2000년대 초반 표면화되기 시작한 분야였고, 저는 2004년 본격 합류했어요. 필드가 형성되지도 않았고, 당연히 활성화된 커뮤니티도 없었던 때죠. 하지만 저를 포함해 많은 연구자들이 이 주제와 씨름하며 사실상 올인했을 거예요.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과가 가능했다고 봐요. 연구에 임하는 자세나 태도는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또 저에게도 꽤 들뜨는 일이긴 합니다.”

생각 속 구조가 현실이 되기까지

MOF는 금속 이온과 탄소 기반의 유기 분자가 결합해 형성된 결정성 물질이다. 금속 이온이 결합의 중심이 되고, 유기 분자가 이를 연결하면서 3차원 격자 구조를 이룬다. 이 과정에서 구조 내부에는 매우 많은 빈 공간이 생기는데, 이러한 다공성 구조가 MOF의 가장 큰 특징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이 구멍들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내부 표면적이 극도로 넓다. 1그램의 MOF가 지닌 내부 표면적은 축구장 하나에 맞먹는 수준으로, 기체나 분자를 흡착·저장하는 데 탁월한 성능을 보인다고. 특히 금속 이온이나 유기 분자의 조합을 조절하면 특정 분자만을 선택적으로 포집할 수 있는데, 이 선택성 역시 기존 다공성 물질과 구별되는 중요한 장점 중 하나다. 예를 들면, 공기 중 극미량으로 존재하는 수증기만을 흡착해 물을 얻거나, 발전소와 공장에서 배출되는 혼합 가스 가운데 이산화탄소만을 분리·회수하는 기술에 활용할 수 있다. 또 수소 저장과 같은 에너지 기술, 유해 물질을 감지하는 센서, 화학 반응 효율을 높이는 촉매, 약물을 특정 부위로 전달하는 의료 기술 등 MOF의 활용 가능성은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는 중이다. 이에 영국 왕립과학원은 MOF 연구를 두고 “금속 이온과 유기 분자를 결합해, 이전에는 구현되지 않았던 넓은 내부 공간을 지닌 새로운 분자 구조를 구축한 성과”라고 평가한 바 있는데, 이는 화학 연구가 개별 물질의 합성을 넘어 분자가 머물고 이동하는 공간 자체를 설계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조립 방식이 만드는 반전의 물리

MOF에 대한 쉬운 설명을 부탁하자 최 교수는 이를 ‘레고의 원리’에 빗대 풀어냈다. 블록으로 집과 자동차처럼 전혀 다른 형태를 만들 수 있듯, MOF 역시 같은 재료를 바탕으로도 전혀 다른 구조와 성질의 설계가 가능하다. 길쭉한 막대처럼 공간의 뼈대를 이루는 요소와, 그 막대들을 연결하는 부위가 만나 하나의 구조를 형성하는 원리다. 이러한 조합을 통해 기존 고체 물질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디자인할 수 있는 고체’라는 개념이 비로소 가능해졌다고 최 교수는 부연했다.
“빈대떡을 손으로 누르는 장면을 떠올려보시면 이해가 쉬워요. 보통은 옆으로 퍼지지만, 간혹 누를수록 안쪽으로 모이는 특성을 보이는 물질도 있습니다. 200여 년 전 수학자 푸아송이 제안한 이 개념은 오랫동안 이론에 머물러 있었고, 자연계에서도 극히 제한적으로만 관찰됐죠. 하지만 MOF에서는 이러한 구조를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면 됩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물성에는 ‘연결 방식’이라는 핵심 변수가 존재한다. 물질이 압력을 받을 때 단순히 찌그러지거나 압축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 구조가 회전하며 형태를 바꾸도록 설계하면 전체 구조는 오히려 수축하는 거동을 보인다는 것. 물론 이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레고 블록 수준의 조립에서가 아닌, 분자 단위에서 연결성과 회전 메커니즘을 구현했을 경우의 결괏값이다. 결국 물질의 거동은 개별 분자의 성질보다, 그 분자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배열’되는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즉, 특정한 연결 구조를 ‘설계’하면 그에 따라 위상(topology)이 정해지고, 그 결과 기존 고체 물질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물성을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설계에서 기술로,
MOF가 여는 응용의 지평

최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설계 개념은 이론적인 흥미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쓸 수 있는 기술과 연결되고 있다. 가령, 푸아송 비 물질은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질 때 힘을 한쪽으로 몰아주지 않고 넓게 분산시키는 특성이 있어 충격 흡수재와 같은 분야에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아직 상용화 단계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고.
환경·에너지 분야에서도 같은 방식의 접근이 가능하다. 예컨대, 수소 저장 기술의 핵심은 고체 내부에 수소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있는데, 그 공간이 지나치게 크면 수소는 벽과 충분히 상호작용하지 못한 채 그냥 빠져나가기 쉽다. 이때 MOF는 내부 공간의 크기와 형태를 정밀하게 조절하고, 더 나아가 그 공간을 이루는 금속 성분까지 함께 설계함으로써 이러한 한계를 넘는다. 수소 분자가 고체 안에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조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러한 설계 개념을 2023년 ‘종이접기(origami)’에서 착안한 구조 설계로까지 확장한 바 있다. 종이에 선을 긋고 접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와 거동이 나타나듯, 분자 구조 역시 접힘과 펼침이 가능하다면 그 구조의 변화 자체가 하나의 물성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해, 결정학적 분석과 X선 회절 실험, 계산 모델링을 병행했다. 그리고 실제로 구조가 가역적으로 변화하며, 그에 따라 물리적 특성도 달라진다는 점을 단계적으로 검증해 나갔다. 당시 이 연구는 구조의 형태 변화가 부수적 현상이 아니라, 물성 설계의 핵심 변수로 작동할 수 있음을 제시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화학, 물질세계와
개념 세계의 ‘넘나들이’

최 교수에게 이 모든 연구는 하나의 물질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MOF는 특정 용도에 한정된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연구 영역과 가능성을 계속 열어가는 ‘플랫폼’에 가깝다. 그렇다면 MOF 연구가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진 성과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질문에 대해 최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하나의 여정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항해 시대에 탐험가들이 배를 타고 미지의 대륙을 향해 나아갔듯, 연구자들이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물질의 세계를 하나씩 발견하고 제안해 가는 통로가 바로 MOF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영화감독과 같다는 표현도 그래서예요. 각기 다른 전문성을 지닌 학생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저는 그 전체의 방향과 서사를 설계해야 하죠. 그만큼 팀 전체를 대표하는 책임과 사명을 자각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그 무게는 부담으로 남기보다, 연구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점점 더 키워 주고 있습니다.”
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지만, 최 교수는 한때 화학이 재미없었다고 털어놨다. 공식과 반응식을 암기하며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판단도 했고, 그래서 마음이 잠시 ‘영화감독’으로 달아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구의 길에서 서서히 정립하게 됐다는 ‘화학은 개념으로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라는 정의는 시나브로 그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최 교수에게 있어 MOF는
특정 용도에 한정된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연구 영역과 가능성을
계속 열어가는 ‘플랫폼’에 가깝다
제올라이트를 향한 다음 걸음

최 교수에게 화학은 두 개의 세계를 오가는 일이다. 아침에 출근하며 커튼을 열듯, 그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지나 분자의 세계로 들어간다. 퇴근할 때는 다시 그 커튼을 닫고 현실로 돌아온다. 물질의 세계와 생각의 세계,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오가며 두 세계를 잇는 번역자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다음 관문은 오랫동안 난제인 ‘제올라이트’예요. 지난 20여 년간 축적해 온 설계 경험도 있고, MOF라는 플랫폼이 확고해졌으니 그동안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졌던 제올라이트 설계 역시 도전해 볼 수 있겠다 싶어요. 게다가 AI라는 새로운 도구까지 더해졌으니 이제야 비로소 그 난제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거죠. 말의 속마음을 이해하는 ‘홀스 위스퍼러(Horse Whisperer)’처럼, ‘제올라이트’의 가능성과 성질을 발견해 세상에 내놓고 싶습니다.”
외우는 화학에서 시작해, 설계하는 화학으로. 혼자 하는 연구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로. 최 교수가 지난 20여 년간 걸어온 길은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와 우리가 사는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리는 지금도, 조용히 다음 장면을 향해 이어지고 있다.

ZEOLITE

제올라이트, 오래된 다공성 소재의 새로운 질문

제올라이트(Zeolite)는 규소(Si)와 알루미늄(Al) 산화물이 산소를 매개로 결합해 형성된 결정성 다공성 무기 소재다. 내부에 균일한 미세 기공을 지니고 있어 특정 분자를 선택적으로 흡착·분리할 수 있으며, 석유화학 촉매, 가스 정제, 세제 원료 등 산업 현장에서 오랫동안 핵심 소재로 활용돼 왔다. 제올라이트의 가장 큰 강점은 높은 열적·화학적 안정성이다. 고온·고압 조건에서도 구조가 쉽게 무너지지 않아 산업적 신뢰성이 뛰어나다. 반면 자연계에 존재하거나 제한적으로 합성 가능한 구조에 의존해 왔다는 점에서, 기공의 크기와 형태를 연구자가 의도대로 자유롭게 설계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다만 최근에는 MOF 연구를 통해 축적된 구조 설계와 연결성 제어 경험을 바탕으로, 제올라이트 역시 ‘설계 가능한 다공성 소재’로 확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오래된 소재이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질문을 품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