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결성된 ‘그랜드 피아니스타’는 학부의 피아노 동아리 ‘피아니스타’의 대학원 버전이다. 학부 시절 피아노 동아리 ‘피아니스타’에서 함께했던 멤버들이 대학원에 진학한 뒤,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점심 식사 자리에서였다. 팬데믹을 지나며 자연스레 피아노와 멀어진 데다, “연구실과 실험실만 오가느라 수년간 이어온 연주 경험이 휘발되는 것 같다”는 꼭 같은 마음이 모인 날이기도 했다.
“모두 동아리 활동을 그리워하고 있었죠. 학부를 졸업했으니 ‘동아리’로 모일 순 없고, ‘그랜드’라는 단어를 붙여 대학원생들의 모임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했습니다. 실험과 논문에 파묻혀 지내는 공대생들이 피아노를 연주한다면 그 소리는 다른 연구자들에게도 색다른 울림이 될 것 같았고요. 거창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었는데 여기까지 왔네요.”
그렇게 시작된 ‘그랜드 피아니스타’의 첫 공연은 이들에게 2024년 본격적인 멍석을 깔아줬다. 공학관 로비에 공용 그랜드 피아노가 놓이더니, 당시 에너지화학공학과 송현곤 교수의 축사를 시작으로 제대로 된 공연을 소화하게 된 것. 그때부터 공학관의 풍경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음을 성민규 학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연구실과 실험실 사이를 메우자, 공기조차 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계산과 수식으로 가득하던 공간에 기분 좋은 바람이 지나는 것처럼 굳은 표정은 풀리고 바쁜 걸음은 늦춰졌죠. 피아노 선율이 숨을 고를 수 있게 한 거예요. 멈춰 서서 감상하는 사람들을 보며 피아노라는 매체 하나로 공학의 ‘딱딱한’ 분위기가 부드럽고 유연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들이 공연 제목으로 선택한 문장 역시 단순한 서술이 아니다. 반복되는 실험과 시행착오, 수정과 재설정의 사이클 속에서 “대학원생이 피아노를 칩니다”라는 표어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에게 건네는 무언의 인사이자 위로다. 연구에 최적화된 환경은 때로 일상을 단조롭게 만들지만, 음악은 이들에게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를 다시 정렬하게 하는 시간으로 작용한다. 그들이 매년 두 차례 무대에 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음악으로 만들어낸 이 짧은 여백이, 자신들뿐 아니라 주변의 연구자들에게도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쉼이 되기를 바라서다.
피아노는 많은 이들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익숙한 악기지만, 다시 건반 앞에 앉게 된 계기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군 복무 시절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콩쿠르 우승 소식을 접한 뒤 충동처럼 전자피아노를 들여놓고 독학을 시작했고, 또 누군가는 가족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가까워졌다.
윤수빈 학생에게 피아노는 언니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접한 악기라고 한다. 전공을 고민할 정도로 애정 깊었지만, 그런 만큼 언제까지나 즐거움의 요소로 함께하기를 택했다고. 그리하여 여섯 살에 처음 만난 건반은 여전히 그녀에게 ‘편안하게 곁을 지켜주는’ 가장 가까운 친구의 의미다.
반면 강윤구 학생에게 피아노는 비교적 늦게 찾아왔다. 석사 과정에 진학한 뒤 잠깐 보컬 학원에 다니던 중, 피아노 선생님의 제안으로 지난 연말 공연에서 처음 반주를 맡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때 음악을 더 깊이 듣고 연주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고, 이후 다양한 작곡가와 연주자의 곡을 찾아 들으며 피아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피아노와의 인연은 저마다 달라도, 그 중심에는 언제나 ‘소리’가 있다. 건반을 누르면 언제나 같은 음이 울리는, 정직한 악기. 그러나 그 소리는 연주자를 만나며 전혀 다른 표정을 갖는다. 같은 곡도 누군가의 손에서는 부드럽게,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는 단단하게 흐르고,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변주된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른 것처럼, 피아노의 소리에도 연주자의 성격과 해석이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굉장히 단순한 악기예요. 누구나 소리는 낼 수는 있지만, 그 소리를 얼마나 다채롭게 빚어내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죠. 건반을 어떻게 누르느냐에 따라 결이 달라지고, 그 미묘한 차이 속에 연주자의 해석과 의도가 담기니까요. 그 마음이 듣는 사람에게 닿을 때, 연주는 비로소 음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윤수빈 학생의 이러한 말처럼, 피아노의 소리는 연주자의 해석을 거쳐 하나의 서사로 완성된다. 그리하여 피아노 연주는 악보에 충실하면서도 연주자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작업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완성해 가는 공연은 곡의 흐름과 감정의 방향을 치밀하게 설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구조를 짜는 연구와도 닮은 부분이다. 실험과 수정, 실패와 재구성을 반복해 온 이들에게 이러한 닮음은 낯선 위안이 된다. 음악은 연구와 단절된 휴식이 아니라, 같은 리듬 위에서 잠시 속도를 늦출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형태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랜드 피아니스타’는 공학과 자연과학, 인문사회에 이르기까지 전공의 경계 없이 다양한 대학원생들로 구성돼 있다. 창단 멤버뿐 아니라 공연을 보고 공감해 합류한 사람들, 동료의 추천으로 찾아온 이들까지 더해지며 모임의 스펙트럼도 점차 넓어졌다. 실험 일정과 세미나, 논문 마감과 지도교수 미팅으로 자주 모이기는 어렵지만, 그 드문 ‘집결’은 삭막해지기 쉬운 연구 생활에 작은 활력을 보탠다. 게다가 공연과 활동을 지속적으로 돕고 무대에도 함께 서 온 이인경 교수의 동행이 있어, 이들의 연주는 연구실 밖에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배움이자 위로가 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화려한 성과가 아니다. 이 무대가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닿는 것, 고된 연구 일정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릴 이유 하나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대는 대학원생에게만 열려 있지 않다. 실력과 무관하게 음악을 계속하고 싶은 연구자라면 누구나 함께 설 수 있다. 졸업생과 박사과정 연구자, 교수들이 게스트로 무대에 오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은미 교수의 비올라, 원태준 교수의 가곡, 안광진 교수의 캐럴 무대까지—연구실에서 보던 얼굴이 아닌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마주하는 순간은 대학원생들에게 무엇보다 큰 격려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