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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도전, 그리고 성찰의 열매
오가노이드로 그리는 미래 의료


바이오메디컬공학과 박태은 교수팀

한 연구실의 배양접시 위.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구슬들이 조용히 자라고 있다. 얼핏 보면 투명 젤리 속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현미경을 통해 보이는 그 ‘젤리 점’은 하나의 새로운 우주와 같다. 복잡하게 얽힌 세포층, 분화하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조직들. 바로 인간의 장기를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오가노이드(Organoid)’, 즉 ‘미니 장기’다. 배양접시 위에서 생명의 가능성을 빚어내며 의학의 새로운 길을 열고 있는 박태은 교수팀을 만났다.

  • Words. 편집실   Photographs. 전경민
Backstory

인체는 자연에서 가장 복잡한 유기적 시스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포 간 상호작용과 장기 네트워크를 시험관 속에 재현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때 동물실험은 의학의 발전과 함께 각종 백신·항암제·치료제 개발, 신약 안전성·유효성 검증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현재까지도 동물실험의 수요는 여전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농림축산검역본부가 발표한 「2024년도 동물실험윤리위원회 운영실적 및 실태조사 결과 보고」1) 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실험기관에서 사용된 동물은 총 459만 2,958마리로 집계됐다. 이는 10년 전 약 250만 마리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다만 동물학대 논란은 꾸준히 제기돼 왔고, 급기야 지난 4월 미국 FDA가 동물실험 요건의 단계적 폐지를 공식 발표하면서 동물실험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 세계적으로 더욱 확산되는 추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는 것이 ‘오간온어칩(Organ-on-a-chip)’과 ‘오가노이드’다. 즉 세포 단위의 정밀한 상호작용과 장기 네트워크를 모사함으로써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신약 개발의 혁신적 기술로 떠오른 것이다.

1.
https://www.animal.go.kr/aec/community/show.do?boardId=boardID03&menuNo=3000000016&seq=101222M
더 인간적인 의학을 향한 ‘질문’

배양접시 위에서 작은 생명의 우주를 빚어내는 박태은 교수팀의 연구는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실험동물의 희생을 줄이고, 개인 맞춤형 치료 시대를 열겠다는 사명감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 연구팀을 이끄는 박태은 교수는 대학원 시절부터 동물실험에 대한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다. 박사과정에서 뇌 유전자 치료법을 연구하며 수많은 마우스를 희생시켜야 했던 경험은 그에게 깊은 고민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고민은 “동물실험을 줄이면서도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낼 방법은 없을까?”라는 질문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론 마우스 세포로 만든 뇌혈관 모델(in vitro model) 같은 대안이 존재했지만, 실제 생체와 비교했을 때 구조적·기능적 한계가 있었다. 이에 박 교수는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박사과정 후반과 미국에서의 박사후연구원 시절부터 오가노이드와 오간온어칩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동물의 희생을 줄이면서 인간의 생리학을 더 정확히 반영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바람이 지금은 연구팀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고 있죠. 예전엔 혼자 분투하며 답을 찾아야 했지만, 지금은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실험을 이어가니 훨씬 든든합니다. 작은 장기 속에 담긴 거대한 도전이, 더 인간적인 의학의 미래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요.”

오가노이드 배양접시
좌절과 성찰, 미니 장기의 ‘성장통’

오가노이드는 영화 속 ‘대체 장기’와는 다르다. 연구팀이 만드는 것은 실제 이식을 위한 장기가 아니라, 질병의 원리를 탐구하고 신약의 효과와 독성을 평가하기 위한 ‘생체 모사 모델’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설명 뒤에는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찰나의 기쁨이 겹쳐있다. 박 교수는 6개월 넘게 실패만 거듭하던 어느 겨울 새벽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폭설에 대중교통마저 끊긴 날이었어요.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에 쫓겨 사람도 없는 눈길을 걸어 연구실로 향하면서도, 마음으론 얼마나 포기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켜진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배양접시 위로 그동안의 실패가 겹겹이 쌓여 있는 것만 같았죠. 그러나 무언가에 이끌리듯 다시 실험을 시작했고, 거짓말처럼 연구의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어요. 마치 신이 우리를 끝까지 몰아붙이다가 ‘이제 됐다’며 선물을 던져주는 것 같았던 그 경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화기관 모델은
튜브 형태로,
뇌 모델은 전극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주고받으며
점차 성숙을 유도했다.
이처럼 공학적 접근은
단순한 보조 수단을 넘어,
오가노이드를 ‘아기 장기’에서
‘성인 장기’로 성장시키는
결정적 발판이 됐다.

그 경험은 박 교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연구 성과는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으며,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쳐야만 새로운 결과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같은 과정을 지나 성취를 이루어낼 때, 겉으로는 담담해 보여도 속으로는 누구보다 깊은 감격과 자부심을 느낀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무게를 알기에, 연구팀의 도전을 언제나 자랑스럽고 고맙게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이 쌓이며 연구팀의 오가노이드는 조금씩 진화했다. 세포들이 스스로 조직을 이루고 3차원 구조를 형성하면서 장기와 유사한 기능을 갖추기 시작한 것. 그러나 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태는 장기와 닮았지만, 기능은 아직 태아 수준에 머무는 ‘성숙(Maturation)’의 문제였다. 혈관이 없어 산소와 영양분이 내부까지 전달되지 못해 일정 크기를 넘으면 세포가 죽어버렸다. 오가노이드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도로망이 부재한 셈이었다.

아기 장기에서 성인 장기로, 오가노이드의 성숙 실험

특히 뇌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뇌는 인체에서 가장 복잡한 장기로 수많은 세포가 정밀하게 협력해야 제대로 작동한다. 그러나 혈관이 없는 뇌 오가노이드로는 실제 뇌의 방대한 에너지 소모 환경을 재현하기 어려웠다.
이에 연구팀은 생물학의 틀을 넘어 공학과 손을 잡았다. 오가노이드를 칩 위에 올리고, 미세한 관을 통해 유체를 흐르게 한 오간온어칩 기술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혈류처럼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농도 기울기를 정밀하게 조절해 실제 인체 환경을 모사한다. 마치 혈관이 없는 도시에 도로망을 새로 깔아주는 것처럼 세포가 더 오래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는 의미다.
소화기관 모델은 튜브 형태로, 뇌 모델은 전극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주고받으며 점차 성숙을 유도했다. 이러한 공학적 접근은 단순한 보조 수단을 넘어, 오가노이드를 ‘아기 장기’에서 ‘성인 장기’로 성장시키는 결정적 발판이 됐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기능적 성숙도를 높이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이 과정은 생물학과 공학이 만나 새로운 의학의 지평을 열어가는 순간이었다.

바이오메디컬공학과 박태은 교수

뇌 오가노이드는
인간의 신경 활동을 재현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까지 던진다.
배반포 오가노이드(Blastoid) 연구는 더 복잡하다.
세포가 자궁 내벽에 착상하면
개체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윤리적 논의가 필수적이다.

실험실에서 환자 곁으로, 오가노이드의 도전

박태은 교수팀의 연구는 이미 현실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암 환자 맞춤형 치료’다. 환자의 암 조직으로 오가노이드를 제작해 여러 약물을 동시에 시험함으로써, 가장 적합하고 부작용이 적은 치료 조합을 빠르게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연구팀은 학과 내 강현욱 교수 연구팀과 협력해 3D 프린팅 기술로 암 오가노이드를 제작하고, 그 형태를 분석해 환자별 암 특성을 파악하는 연구도 진행했다.
이러한 시도는 암 환자 맞춤형 치료를 더욱 정밀하고 현실적인 단계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실제로 전 세계가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연구 체계로 전환하는 추세이며, 미국 FDA는 이미 일부 임상시험에서 동물실험 데이터를 요구하지 않고 오가노이드와 오간온어칩 데이터를 기반으로 허가를 내주기 시작했다. 이는 동물실험 대체 기술의 가능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건 우리가 꿴 첫 단추라고 생각해요. 머지않은 미래에는 태어날 때 자신의 줄기세포를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나만의 미니 장기’를 꺼내 질병을 예측하고 최적의 치료제를 찾는 시대가 정말 올지도 모릅니다.”

윤리와 과학의 균형 찾기 계속

기술이 발전할수록 연구팀의 어깨는 무거워진다. 특히 뇌 오가노이드는 인간의 신경 활동을 재현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까지 던진다. 배반포 오가노이드(Blastoid) 연구는 더 복잡하다. 세포가 자궁 내벽에 착상하면 개체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윤리적 논의가 필수적이다.
연구팀은 이 지점을 누구보다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세포 기증자의 동의 절차를 투명하게 지키고, 연구 목적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는 것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는 동시에, 과학자·법학자·윤리학자 및 사회 구성원이 모두 참여하는 다학제적 논의의 필요성도 강조한다.
“윤리가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는 건 늘 어려운 문제예요. 그래서 더욱, 지금이야말로 과학과 윤리가 균형을 맞춰야 할 시기하고 생각합니다.” ‘작은 구슬에 담긴 거대한 미래.’ 연구팀이 바라보는 미래는 단순한 과학 실험이 아니다. 작은 구슬 같은 오가노이드 속 세계는 언젠가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우리가 꿈꾸던 미래 의료를 현실로 앞당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