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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몸집에 담긴 큰 비밀
과학이 사랑한 모델 동물

동물의 권리와 복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3R 원칙 즉 대체, 감소, 완화(Replacement·Reduction·Refinement)가 기본 동물실험 지침으로 자리 잡았다. 그중에서도 ‘대체(Replacement)’는 오가노이드처럼 꼭 동물을 쓰지 않아도 되는 대체 방법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면 고등동물 대신 하등동물을 이용해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도 포함한다. 신경계와 감각이 덜 발달한 하등동물일수록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낮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예쁜꼬마선충, 초파리, 지브라피시, 제노푸스, 킬리피쉬 같은 작은 모델 동물들이다. 이들은 개, 돼지, 닭, 토끼에 비해 몸집은 작지만, 사람과 닮은 생명 원리를 드러내며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작은 몸집으로 큰 과학의 비밀을 풀어내는 모델 동물들을 지금부터 만나보자.

예쁜꼬마선충(Caenorhabditis elegans)은 이름만 들어도 궁금증이 생긴다. ‘elegans’는 라틴어로 ‘우아하다’라는 뜻인데, 우리말로는 ‘예쁜꼬마선충’이라 옮겨졌다. 생김새는 그다지 예쁘지도, 꼬마 같지도 않지만 이름 덕분에 한결 친근한 이미지다. 길이가 1mm도 되지 않는 이 벌레는 몸이 투명해 현미경으로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몸속 세포 수가 성체 기준으로 딱 959개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작은 벌레의 세포 하나하나가 언제 생기고 언제 사라지는지, 모두 지도처럼 기록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세포 자살(apoptosis), 그리고 RNA 간섭(RNAi) 같은 굵직굵직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예쁜꼬마선충은 노화 연구와 신경망 연구의 대표 모델로 쓰이고 있다.

___Caenorhabditis elegans

임신 테스트기에서 노벨상 연구의 주인공으로까지 진화한 동물이 있다. 아프리카발톱개구리(Xenopus laevis)로 불리는 제노푸스다. 발가락 끝에 발톱이 달려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연구자들이 제노푸스를 선호하는 이유는 알이 유난히 크고 단단해서 다루기 쉽다는 점이다. 게다가 암컷이 한 번에 수천 개의 알을 낳으니 대량 실험도 거뜬하다. 수정란이 체외에서 발달하기 때문에 배아가 분열하고 올챙이가 자라는 과정을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노푸스가 한때 ‘살아 있는 임신 테스트기’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간단한 면역학적 임신진단 키트가 없던 20세기 중반까지 여성들은 임신 여부를 확인하려고 소변을 이 개구리 등에 주사했다. 임신한 여성의 소변에는 hCG라는 호르몬이 들어 있는데, 이 호르몬이 개구리 난소를 자극해 알을 낳게 만드는 원리다. 주사를 맞은 개구리가 하루 만에 알을 낳으면 ‘임신’으로 판정했다. 당시 수백만 마리의 제노푸스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덕분에 오늘날에도 발생학 연구의 대표 동물이 될 수 있었다.
제노푸스는 세포 분열 주기를 조절하는 사이클린(cyclin) 단백질을 발견하는 데 쓰였고, 또 존 거던(John B. Gurdon)경은 제노푸스 난자에 성체 세포의 핵을 이식하는 실험을 통해 “분화가 끝난 세포도 배아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두 발견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___Xenopus laevis

킬리피쉬(Killifish)는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사는 동물이다. 수명은 불과 몇 달에 지나지 않는다. 초파리나 예쁜꼬마선충처럼 수명이 더 짧은 모델 동물도 있지만, 킬리피쉬는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작은 몸집 속에 뇌, 심장, 혈관, 근육, 면역계 등 인간과 닮은 기관과 생리 체계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런 특성 덕분에 킬리피쉬는 최근 과학자들 사이에서 노화 연구의 새로운 스타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다른 동물이라면 수년은 기다려야 관찰할 수 있는 노화 과정을 단 몇 달 만에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킬리피쉬는 짧은 수명 동안 혈관 기능이 저하되고, 기억력이 줄어들며, 면역 기능이 약해지는 등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겪는 현상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운동 능력이 떨어지고 시력이 약해지는 모습, 때로는 종양이 발생하는 과정까지 나타나기 때문에 노화 자체는 물론 노화와 관련된 질병 연구에도 적합하다.
킬리피쉬는 독특한 생활사로도 유명하다. 이 물고기의 고향인 아프리카 모잠비크와 짐바브웨 일대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데, 킬리피쉬의 알은 건기에 흙 속에 묻혀 휴면 상태로 몇 달을 버틸 수 있다. 비가 내려 다시 물웅덩이가 생기면,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듯 알이 깨어나 어린 물고기로 부화한다. 마치 알이 시간을 건너뛰는 듯한 이 생존 전략 덕분에 킬리피쉬는 ‘시간여행자 물고기(Time-traveling fish)’라고도 불린다.
아직 킬리피쉬를 이용한 연구가 노벨상으로 이어진 사례는 없지만, 과학자들은 이 물고기가 가진 독특한 생애주기와 빠른 노화 덕분에 머지않아 노화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잠재력이 크다고 보고 있다.

___KILLI FISH

몸에 줄무늬가 있어 ‘물속 얼룩말’로 불리는 지브라피시(Zebrafish)는 투명한 알 덕분에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순간, 혈관이 자라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사람과 유전자의 70% 이상을 공유하기 때문에 선천성 심장질환이나 혈관 질환 연구에 널리 활용된다.
지브라피시는 유럽과 미국의 독성·환경 연구 분야에서 이미 대표적인 모델 동물로 자리 잡았다. 수정란 단계에서부터 특정 화학물질이나 미세플라스틱이 동물의 발생 과정에 어떤 기형을 유발하고 독성을 미치는지 빠르고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개체를 동시에 테스트할 수 있어 다국적 제약회사들도 신약 후보 물질의 독성이나 안정성을 대규모로 빠르게 평가할 때 지브라피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브라피시는 우주에도 진출한 물고기다. 1970년대 구소련은 우주 공간의 저중력이 척추동물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지브라피시를 우주로 보냈다. 이후 NASA 역시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지브라피시를 활용해 DNA 손상, 신경 발달, 면역 반응 등을 연구하고 있다.

___Zebra fish

여름철 과일 껍질 위를 날아다니는 초파리(Drosophila melanogaster)는 유전학 연구의 단골손님이다. 알에서 성체로 자라는 데 단 10일이면 충분할 정도로 세대 교체가 빠르고, 원하는 유전자를 조작하기 쉽다.
실제로 초파리는 연구자에게 가장 많은 노벨상을 안겨준 모델 동물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5년 노벨 생리의학상이다. 에드워드 루이스(Edward B. Lewis), 크리스티아네 뉘슬라인-폴하르트(Christiane Nüsslein-Volhard), 에릭 비셔스(Eric Wieschaus)는 초파리 실험을 통해 Hox 유전자의 기능을 규명했다. Hox 유전자는 배아 발달 과정에서 몸의 청사진을 그려주는 유전자다. 이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해야 어디에 머리가 생기고, 어디에 가슴과 다리가 생기는지가 정해진다. 실제로 Hox 유전자가 고장 나면 다리가 날개 자리에 돋아나는 등 몸의 구조가 뒤섞인 돌연변이가 나타난다.
이 밖에도 염색체가 유전의 단위라는 점, 방사선이 유전자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사실, 선천면역 유전자 Toll, 생체시계 유전자까지 모두 초파리 연구에서 밝혀졌다. 이렇게 보면, 날아다니는 작은 파리가 현대 유전학의 뿌리를 닦아낸 셈이다.

___Drosophila melanogaster
나가며

오늘 살펴본 작은 모델 동물들은 몸집은 작지만, 세포·유전자·발생·노화 같은 생명현상의 원리를 밝히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해왔다. 초파리와 예쁜꼬마선충, 효모는 이미 여러 번 과학자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고, 제노푸스와 킬리피쉬 같은 동물도 새로운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오가노이드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동물실험을 크게 줄일 수 있는 길을 열었지만, 개체 전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대신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앞으로도 이 작은 모델 동물들은 새로운 기술의 한계를 보완하며, 인류가 생명의 비밀을 밝히는 여정을 함께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