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붙기 위해서는 연료(땔감)와 에너지, 산소가 필요하다. 현재의 배터리는 보통 양극재와 분리막, 액체 상태의 전해질로 구성되는데, 액체 전해질은 유기물이고 분리막은 고분자라 불이 잘 붙을 수밖에 없다. 또 양극재 성분 중에 이미 산소가 포함돼 있으며, 배터리 과부하가 일어나 열이 발생하면 에너지까지 확보된다. 여기에 더해 불이 크게 확산하기 위해서는 라디칼(하나의 전자를 가지는 원자 혹은 분자로 매우 불안정한 것이 특징) 연쇄 반응이 필요한데, 액체 전해질 내에서는 이런 반응이 손쉽게 이뤄진다. 즉, 다양한 상황으로 인해 배터리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면 불이 나 확산하기 쉬운 구조다.
“1970년대 영화 중에 ‘타워링’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세계 최대 초고층빌딩에서 과전압 합선으로 큰 화재가 발생하는 재난영화죠. 큰 건물 지하 주차장 1~3층이 모두 전기차로 채워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기차 한 대에서 화재가 일어나면, 수많은 전기차가 폭탄처럼 연쇄적으로 터져 상상하지 못할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송현곤 교수는 전기차 확대에 앞서 화재에 강한 배터리를 연구, 생산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배터리 분야는 좋은 스펙을 갖추는 데 집중했다. 한 번 충전으로 더 오래 달리고,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하는 효율성에만 힘써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효율성은 기본이고, 안전성까지 확보한 배터리가 요구되고 있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도 배터리 안전성에 주목하며 새로운 전략을 짜는 상황이다.
화재에 강한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 기존에도 다양한 연구가 진행됐다. 대부분은 액체 전해질에 과량의 난연 첨가제를 섞거나 매우 높은 끓는점을 가진 용매를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기존 방법들은 전해질의 이온 전도도를 급격히 감소시켜 배터리 효율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기에, 최근 송현곤 교수 연구팀이 이뤄낸 성과가 더욱 빛난다.
송현곤 교수는 한국화학연구원 정밀화학연구센터 정서현 박사,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울산차세대전지연구개발센터 김태희 박사 연구팀과 손잡고 불에 타지 않는 ‘불연성 고분자 반고체 전해질’을 개발했다. 전기 배터리 화재를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연구 성과로 주목받으며, 에너지 분야의 권위 학술지인 『ACS 에너지 레터스(ACS Energy Letters)』 표지 논문으로 선정돼 지난 10월 13일 온라인 게재됐다. 관련해서 국내 5건, 해외 2건의 특허도 출원한 상태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등 배터리 관련 주요 기업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난연성이란 그 자체가 불에 잘 타지 않는 소재이거나 불에 타는 다른 부분에 영향을 미쳐 소화제 역할을 담당하는 것, 이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개발한 불연성 고분자 반고체 전해질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것이 특징입니다.”
송현곤 교수 연구팀은 2013년부터 반고체 전해질을 연구해 왔다. 반고체란 액체와 고체가 섞인 상태로, 액체처럼 유동성을 가지면서도 그물망 구조의 고체에 잡혀 전체적인 형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젤리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연구팀은 액체 전해질에 미량의 고분자를 첨가해 고분자 반고체 전해질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다양한 기능성을 부여하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이번에 개발한 불연성 고분자 반고체 전해질은 연소 과정에 꼭 필요한 연료와 라디칼 연쇄 반응을 억제해 화재 예방에 효과적이다.
“처음부터 난연성을 연구했던 건 아닙니다. 3년 전쯤 이번 논문의 제1 저자인 정지홍 연구원이 난연성에 흥미를 갖고 그동안 다뤘던 물질들을 태워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간 우리가 개발했던 반고체 물질이 기본적으로 불에 잘 타지 않는다는 걸 발견한 거죠. 확실한 난연성을 추가하기 위해서 고분자 합성과 필드 테스트가 필요했는데, 저희는 전기화학 연구실이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울산에 소재한 연구센터들과의 협업을 택했습니다.”
송현곤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기본적으로 불에 잘 타지 않는 특징을 지닌 반고체에 소화제 역할을 하게 될 몰리큘 분자를 달아보자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한국화학연구원 정밀화학연구센터를 찾았다. 그리고 합성된 결과물이 여러 극한 상황을 버틸 수 있는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울산차세대전지연구개발센터에서 테스트했다. 3개 기관이 각각의 역량을 발휘하며 시너지를 낸 덕분에 마침내 세계 수준의 성과를 얻게 됐다.
하지만 배터리의 안전성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면 무용지물. 연구팀이 개발한 불연성 고분자 반고체 전해질은 기존 액체 전해질 대비 33%나 높은 리튬 이온 전도도(4.8mS/㎝)를 보였다. 또 이를 활용해서 만든 파우치형 배터리의 경우, 보통의 배터리보다 수명이 110% 향상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터리의 효율성은 이온 전도도와 직결됩니다. 기존 연구처럼 액체 전해질에 난연성 물질을 첨가하는 방식을 취하면 30% 정도를 난연성 물질로 대체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만큼 이온 전도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죠. 이번에 개발한 불연성 고분자 반고체 전해질의 경우에는 여러모로 장점이 많습니다. 기존 액체 전해질에 단 2wt%의 고분자 물질을 첨가하기에 리튬 이온 전도도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고, 기존 배터리 조립 공정에 바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리튬이온전지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췄다. 그러나 중국과 유럽, 미국 등이 바짝 추격하고 있다. 최고 스펙을 구현하면서 안전성까지 챙기는 일은 쉽지 않지만, 배터리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큰 무기가 될 것이다.
송현곤 교수는 ‘첨단 기술 전기화학 실험실(ECLAT)’을 이끌며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콘셉트를 정했다. 고온과 저온 파트로 나눠 연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번 불연성 고분자 반고체 전해질 개발은 고온 파트에 해당한다. 저온 파트의 대표적 연구는 마이너스 30~50℃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 일명 아이스 전해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이 외에도 수소 에너지 생산에 결정적인 전기분해 촉매 연구도 진행 중이다. 주촉매와 부촉매를 이용한 중복 활성화가 차별화 포인트다. 차세대 전지 중 하나인 징크이온전지 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징크이온전지는 수계아연이온전지라고도 불리는데 전해질이 물이라 친환경적이면서도 저렴하고 기존 리튬이온전지보다 수명이 길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달 궤도선을 올렸고, 2032년까지 달 착륙선 개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주 개척이나 심해 연구가 본격화되면 극저온에서 구동되는 배터리가 필요합니다. 극한의 온도와 환경에서도 효율성과 안전성을 유지하는 배터리는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것입니다. 미래 시대를 좌우할 기술 연구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또 UNIST가 지역과 국가의 성장을 이끄는 의미 있는 학교가 될 수 있게 창의적인 학생들을 이끌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