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술의 시작은 ‘모방’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보거나 만져본 어떤 경험이 모티브가 되어 새로운 기술로 탄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이순신의 거북선은 모방기술의 대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단단한 등껍질이 있는 거북이의 모양과 목을 뺏다 넣었다 하는 특성을 모방해 전에 없는 형태의 전투선을 완성했다. 형태를 모방한 사례 외에도 물질의 성질이나 특성을 모사해 개발된 기술도 많다. 보통 ‘찍찍이’라고 부르는 벨크로는 엉겅퀴나 도꼬마리 열매가 동물의 털이나 옷에 잘 붙는 것을 보고 갈고리 모양을 모사해서 만든 기술이다. 또 일본의 고속 열차 신칸센의 경우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열차의 앞머리 부분을 물총새를 모사해 만들었다.
이러한 모방의 핵심은 잘 들여다보는 것, 즉 관찰에서 출발한다. 어떠한 물질이, 현상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과거에는 거북선처럼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 모티브가 됐지만, 과학이 점차 발전됨에 따라 수십, 수백 나노미터(㎚)의 현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특성과 성분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다양한 기술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람의 눈으로 물체를 구별할 수 있는 해상력은 대략 0.1밀리미터(㎜) 정도라고 한다.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두께라고 보면 된다. 이보다 작은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광학현미경이나 전자현미경과 같은 장비가 필요하다. 전자현미경에는 크게 주사전자현미경(SEM)과 투과전자현미경(TEM)이 있는데, 주사전자현미경은 주로 시료 표면의 미세구조를 고배율로 관찰하는 장비이고, 투과전자현미경은 주로 시료의 내부구조를 고배율로 관찰하는 장비이다.
이번 호에서 중점적으로 소개할 장비는 바로 ‘주사전자현미경’이다. 앞서 소개한 자연모사기술에 활용되는 대표적 장비 중 하나이다. 특히 주사전자현미경은 재료공학, 반도체, 생명과학, 식품과학 등 대부분의 연구 분야에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활용도가 높은 장비이기도 하다.
주사전자현미경은 시료 표면에 미세구조를 고배율의 영상 이미지로 확인하는 장비로, 물질의 형상 확인부터 성분분석까지 가능하다.
‘표면분석장비’이기 때문에 고체로 된 시편은 무엇이든지 측정할 수 있다. 가로세로 1밀리미터 정도의 크기 혹은 그보다 작은 크기라도 측정 가능하며, 시편에 전자빔(E-beam)을 계속 주사해 스캐닝하는 과정에서 나온 신호를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그밖에 고분자(polymer)나 바이오 물질 같이 전도성이 없는 물질의 경우에도 별도의 전처리 과정*을 거치면 표면을 측정할 수 있다.
현재 주사전자현미경은 UCRF 기기분석실에 5대, 나노소자공정실에 2대를 보유하고 있다. 주성분 분석이 가능한 EDS, 고분해능의 미량 원소 성분 분석이 가능한 WDS 등 다양한 보조장치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자율사용자 정규 교육을 통과한 UNIST의 학생이나 연구자는 365일, 24시간 해당 장비를 예약 후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주사전자현미경 보유 수가 많은 까닭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는 장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 경우 웨이퍼에 특정 물질을 증착시키게 되는데 이 물질들의 증착이 잘 되었는지, 몇 나노미터로 증착했을 때 가장 좋은 성능을 구현할 수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험이 그러하듯 한 번의 테스트로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만들고 확인하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뤄지기 마련인데, 여러 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대기 없이 원하는 때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타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경우 주사전자현미경의 활용도가 높은데 비해 보유대수는 1~2대에 그쳐 연구자가 한 번 사용하기 위해서는 1~3개월 정도 대기해야 할 정도라고. 이 같은 차이는 연구 진행 속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UNIST의 연구 성과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연구자들은 시편의 단면을 관찰하고자 하는 요구가 많은 편이다. 이 역시 주사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다. 대신 시편을 세로로 자르는 전처리 과정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물질의 경도가 다르게 되면 자르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물질은 가위나 칼로도 자를 수 있지만, 강철 같은 단단한 물질을 자를 때는 별도의 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또 부드러운 물질이라 하더라도 가위로 자르게 되면 가위질을 했던 부분마다 씹히는 부분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종이나 천을 자를 때도 가위질을 한 번에 하지 못하고 여러 번에 나눠서 하면 울퉁불퉁 뜯어지는 부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씹힌 부위가 발생하면 제대로 된 단면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된다. 즉 전처리 과정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좋은 연구결과를 얻기 어려워진다.
UCRF는 시편을 다듬거나 자르는데 활용하는 다양한 전처리 장비를 갖추고 연구자들이 좋은 연구 결과를 얻도록 지원하고 있다. 각 전처리 장비들은 특정한 목적에 맞춰 활용되고 있다. 고분자나 바이오 물질부터 강철에 이르기까지 각 물질에 맞는 전처리 장비를 구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온밀링시스템과 울트라마이크로톰이 있다. 이온밀링시스템은 시편에 울퉁불퉁한 부분에 아르곤(Ar) 이온을 조사해 곱게 다듬는 방식이다. 울트라마이크로톰은 고분자나 바이오 물질을 자르는 장비로, 다이아몬드로 된 칼로 시판을 절단하는 방식이다. 두 장비 모두 시편의 단면을 깨끗하고 고르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고효율의 연구 결과를 얻는 데 유리하다. 이와 같은 전처리 장비들은 주사전자현미경에 비해 활용도가 낮은 편이다. 하지만 연구의 질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UCRF는 모든 장비를 다 갖출 수 없으므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최적의 연구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연구자의 수요, 연구현황, 미래가치 등의 판단기준에 따라 보유 장비를 선택하고 있다.
앞으로 UCRF는 주사전자현미경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함으로써 연구지원에 나설 계획이다. 우선 합성한 시료의 3D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FIB 3D simulation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사전자현미경의 업그레이드를 고려하고 있다. 물질을 합성했을 때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3D로 보고 싶다는 연구자들의 수요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점점 더 작은 규모의 분석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대물렌즈가 in-lens 타입(투과전자현미경 수준의 배율, 약 x300k나 그 이상)이거나 스노클 타입인 초고분해능 주사전자현미경 도입도 고려 중이다.
과학의 발전은 곧 연구 장비의 발전이기도 하다. 연구의 활성화와 결과 도출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장비 도입과 기존 장비의 업그레이드는 꾸준히 이뤄져야 할 일이다. UCRF 역시 이러한 필요와 수요를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에 앞으로도 UNIST 연구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