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설계는 넓은 대지 위에 커다란 건축물 혹은 설비를 짓기 위해 필요한 도면 같은 것이다. 화학공정설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울산 석유화학단지나 여수 국가산업단지처럼 대규모의 시설이 화학공정설계의 결과물이다.
“연구실 단위에서 발명된 기술을 1이라고 치면 산업현장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100 이상의 규모로 커져야 하죠. 그런데 단순히 곱하기 100을 해서 크기를 키우진 않아요. 1에서 명확히 작동하던 것이 100이 되었을 때도 똑같이 작동하리란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간극을 설계적인 노하우를 통해 좁혀나가는 것이 바로 저희 연구팀에서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새로운 기술 혹은 더 나은 기술은 연구실에서 출발한다. 연구실에서 수많은 연구 인력이 고민한 결과물이 논문이나 과제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다만 그것이 세상에 본 적 없는 획기적인 기술이라고 해도 바로 현장에 적용 가능한 경우는 거의 없다.
“연구실과 산업계를 잇는 가교역할이 바로 공정설계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상 국내에서 이 부분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이 거의 없다시피 해요. 그러다 보니 현재 화학공정설계는 거의 외국의 원천기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것 하나 고쳐보려고 해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죠.”
그래서 임한권 교수팀은 ‘우리만의 설계기술을 가져보자’는 데에 집중했다. 연구실 단계에서 개발한 결과물을 실증을 거쳐 산업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원천설계기술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핵심 역량은 ‘실증’에 있습니다. ‘실증을 했다’는 것은 산업현장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수준을 검증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UNIST와 같이 학교 단위에서 실증센터까지 갖추고 원천설계기술을 만들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연구중심대학으로서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실증까지 가능한 지원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저희의 화학공정설계가 더욱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임 교수팀이 연구하고 있는 공정설계의 가장 큰 핵심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이다. 화학공정은 수소를 만드는 공정, 각종 제조 공정, 제철 공정 등이 다양하게 이뤄지는데,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공정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것이다. ‘탄소중립’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이들 산업에도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에 대한 변화 요구가 커졌다.
“설계도 시대 흐름을 무시할 수 없어요. 시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메커니즘이 변화하죠. 지금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큽니다. 예를 들어 플랜트를 설계할 때 이산화탄소 포집 설비를 중간에 설치한다든지, 이산화탄소가 한 군데에 모일 수 있는 다른 루트를 만들어주든지 하는 방식으로 고민할 수 있겠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설계에 이런 추가 시설을 설치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제성이 떨어지진 않는지, 비즈니스 모델로 적용 가능한지 등을 함께 검토하는 일입니다.”
결국, 좋은 설계의 표준은 경제성, 기술성, 환경성을 두루 갖춘 것을 의미한다. 지난 8월 국제학술지인 저널 오브 클리너 프로덕션(Journal of Cleaner Production)에 발표한 ‘분산형 시스템과 기존의 중앙집중형 열분해유 생산 시스템의 경제적·환경 타당성을 비교 분석한 결과’는 임 교수팀의 연구 방향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결과물이다.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폐플라스틱을 열분해장치를 이용해 열분해유 즉, 일종의 오일을 얻어내는 설비가 중앙집중형으로 존재해왔다. 지역에서 발생한 폐플라스틱을 중앙처리시설로 옮겨와 한꺼번에 처리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임 교수팀은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분산형’ 시스템을 제안한 것이다.
“중앙집중형은 우선 처리해야 할 물량이 많아 시설이 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듭니다. 이는 기업에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분산형이 되면 초기 투자비용이 줄어들고, 여러 기업이 진출 가능한 시장이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운반해오는 과정이 줄기 때문에 이산화탄소 배출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저널에는 경제적 합리성 그리고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 효과를 검증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폐플라스틱 처리 공정과 마찬가지로 임 교수팀은 화학공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고효율·저비용 생산이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린수소의 대량생산 기술 개발이다.
“수소는 크게 그레이·블루·그린으로 나뉩니다. 석탄이나 천연가스를 높은 온도와 압력을 이용해 획득한 수소를 그레이수소, 그레이수소 생산 단계에서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획득한 수소를 블루수소, 수전해방식으로 물에서 수소를 분리해 획득한 수소를 그린수소라고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린수소를 지향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현재 단계에서는 블루수소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소를 획득하는 과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1kg의 수소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10kg의 이산화탄소가 나온다.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이 중요한 이유다. 이산화탄소는 여건에 따라 나오는 상태가 다르다. 어떤 곳에서는 고농도로, 또 어떤 곳에서는 저농도로 배출되기도 한다. 각 상태에 따라 포집 장치도 달라진다.
“연구팀에서는 이산화탄소가 나오는 곳, 즉 포인트 소스의 조건에 따라 어떤 이산화탄소 포집 장치를 쓸 것인지를 연구·설계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어떻게 활용할까에 대한 고민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린수소의 경제성을 보완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해 대량생산이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세상의 모든 기술은 완벽하지 않다. 단점보다 장점이 더 크기에 세상에 등장한 것일 뿐이다. 임 교수팀은 기존에 존재하는 기술이라 할지라도 단점이 없는지 고민하고 이에 대한 솔루션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갈수록 높아지는 시장의 기준에 명확한 답을 제안하고, 다음 세대의 기술을 제안하고, 이것이 실제 활용될 수 있는 기술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실증하는 것 말이다. 앞으로도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연구팀의 다음이 기대된다.
UNIST 탄소중립실증화연구센터
연구기관은 크게 대학교, 정부출연연구소, 기업연구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학교는 연구실 단위의 연구, 정부출연연구소는 더 규모 있는 공정연구, 기업은 실제 공정연구를 한다고 본다면 탄소중립실증화연구센터(이하 ‘실증화연구센터’)는 학교와 기업의 간극을 메워주는 가교역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연구실 규모의 기술을 실제 산업에 적용 가능한 기술로 ‘실증’하는 매우 중요한 기관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대학교 단위에서 실증화연구센터를 운영하는 사례는 UNIST가 거의 처음일 거예요. 대학교에서는 과제수행이나 논문발표 형식을 빌어 연구성과를 발표합니다. 이 이론은 반드시 실증단계를 거쳐야만 실전에 활용 가능한 기술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그 역할을 실증화연구센터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검증은 물론 기업이 합니다. 최근 GS건설과 MOU를 맺고 이산화탄소 포집·저장·활용 기술에 대한 공정설계를 진행하고 있고 그 외 다수의 기업이 실증을 거친 저희의 기술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UNIST에는 탄소중립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분야도 많고요. 이 연구결과가 산업현장에 효율적으로 안착하는데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연구중심 대학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교와 기업 간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UNIST의 대표 센터로 자리매김하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센터로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지치지 않고 연구에 매달리겠습니다.